창신고등학교 동문회

ㆍ작성자	29회 이진규
ㆍ작성일	2009년 9월 17일 목요일

ㆍ조회: 1700

고모보다 이모

식당 손님들이 서빙하는 종업원을 스스럼없이 '이모'라고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식당 호칭에서 '고모'는 좀 드물며, '숙모'의 경우는 한 번도 없었든 것 같다. 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조차 '이모'라는 호칭은 별 부담이 없는 것일까.

우리 몸의 생리적 구조가 굳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만 년 전, 홍적세 때의 일이다. 우리가 달콤한 것, 짭짭한 것, 고소하고 기름진 것에 탐욕스럽게 집착하는 것은 그런 습성의 종족들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홍적세의 생존원리는 '눈에 보일 때 닥치는대로 먹어두자'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들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직도 그 유전자를 버리지 못해 배가 불러도 밤늦게 냉장고를 열어본다. 현대 성인병은 기계문명의 진화속도에 대처하지 못하는 인간 유전자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유행하는 진화심리학은 현생 인류의 다양한 심리적, 사회적 현상을 진화과정에서 보이는 적응과 변이의 과정으로 해석하려는 신생 학문이다.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확실한 생물학적 관계는 엄마와 자식의 관계이다. 직접 열 달 동안 자신의 배 속에서 키우고, 또 고생하여 낳는 과정은 산모만이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약간의 모호함이 있다. 지금과 같이 유전자를 이용한 친자검사가 없던 시절부터, 아버지와 자식의 친생 관계는 심리적 불안의 근원이 되어 왔다는 것이 진화심리학 쪽의 주장이다. 이런 내용은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와 같이 오랫동안 예술에서 흥미로운 소재가 되곤 했다.

한 단계 친족 위를 본다면 가장 믿을만한 끈은, 확실한 두 단계로 구성된 할머니-딸-손자의 관계이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할아버지-아들-손자로 이어지는 관계가 제일 불확실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로만 이어지는 유교적 부계중심 체계는 유전적으로 볼 때, 모계 중심사회보다는 불완전한 품질관리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양반 성씨의 족보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사실 조선 중기까지 해도 양반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 불과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부계중심의 양반 품질관리는 그다지 성공한 시스템은 아닐 듯 싶다. 대표적 모계중심인 유태인 사회에서는 유태인 엄마가 낳은 자식만이 유태인이 될 수 있다. 유태인들의 타고난 명석함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그것은 유전적으로 보다 안정된 모계중심을 유지하는 사회구성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싶다.

외국에서 발표된 재미있는 보고서가 있다. 공항 면세점에서 어린이 선물을 고르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조사해서 얻은 결론에 따르면 손자에 대한 가장 많은 애정을 보여준 어른들의 순위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순이라는 것이다. 물론 손자에 대한 애정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임은 분명하다. 여러 모임에서 살펴본 필자의 경험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는 거의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가부장 중심의 문화적 압력이 우리 사회에 만일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모계 즉 외가 쪽과의 관계나 영향이 친가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진화심리학은 왜 사람들이 고모보다 이모를 더 친근하게 느끼는 지를 매우 그럴듯하게 설명해준다. 또한 진화심리학은 단 하나의 난자로부터 열 달 공들여 자기 복제품을 만드는, 여성의 소수정예 명품 전략과 남성들의 박리다매 생식전략의 차이로부터 발생되는 심리적 기질 차이까지도 잘 설명한다. 이 때문에 진화심리학은 인종적, 선천적 차이에 따른 차별을 옹호하는 반사회적 이론이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하지만 중·고등 악동들이 젊은 아가씨들의 치마 속을 왜 그렇게도 보고 싶어 하는 지와 같은 미시적인 행동에 대해서는 어떤 이론보다도 더 그럴싸하게 설명을 해준다. 그렇다고 그것을 권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설명은 설명일 뿐 오해하지는 말자.